희귀한 동식물의 세계/식물

야생화 "진범", 정말 범죄형으로 생겼나요

Sosahim 2006. 6. 16. 06:31

헬 박사, 아수라 백작, 브로켄 백작(마징가Z), 카프 박사(태권V), 부루토(뽀빠이), 알렉타(독수리5형제), 괴도 루팡, 모리아티 교수(셜록 홈즈), 렉스 루더(슈퍼맨)... 64년생 용띠인 제 또래가 기억하는 악당 캐릭터들입니다. 요새 아그들(?)이 알려나?

악당! 소리내어 말해보면 단어의 느낌 자체가 참 재미있습니다. 못된 짓 골라서 하라고 임무가 부여된 캐릭터지만, 악당들을 가만히 보면은 오로지 사악한 것만은 아닙니다. 얘기도 제법 통할 것 같고, 악독한 성품 이면 어딘가에 인정을 감추고서 그거 탄로날까 노심초사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지요. 우리 주변 누군가를 가리켜 악당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은 진짜 상종못할 나쁜 인간은 아닌 겁니다.

그에 비해서 삭막하기만 한게 용의자, 피의자, 범죄자, 주범, 공범, 진범 따위 말들이죠. 법전이나 사건 기사에나 어울릴까요. 느낌을 갖고 얘기하기엔 어울리지도 않고 아무튼 느낌이 없죠...

그런데 야생화를 가까이 하시면 달라집니다.
그중에 "진범" 이란 말만 들으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게 되지요.

오늘 소개할 바로 이 녀석 때문이랍니다.


[진범, 2004.9.4 금대봉, Nikon D100, AF 24-85mm(D)]

학명 : Aconitum pseudo-laeve
분류 :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한국 특산식물)
개화 : 8~9월
모양 : 곧추서거나 기울어 자라는 줄기에 잎은 손바닥 모양. 잎겨드랑이에 자주색 꽃이 총상화서로 피어남. 마치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잎은 5장으로 구성되며 겉에 잔털이 돋아있음. 진짜 꽃잎은 위쪽 꽃받침잎 속에 들어있음.
분포 : 전국의 산지 숲속


[진범, 2004.9.4 금대봉, Nikon D100, AF 24-85mm(D)]

이 녀석 볼 때 자꾸 웃음이 나오는 이유... 인상이 험상궂지도 않고 귀엽게만 생겼는데 진범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달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야생화 사진 하시는 분들이 진범 이름을 소재로 얼마나 많은 유머를 지어내는지 모릅니다 ^^


[진범, 2004.9.4 금대봉, Nikon D100, AF 24-85mm(D)]

맨 위쪽 꽃(받침)잎을 보시면 뒤로 꼬부라져 있지요?
이때문에 고개 들고 재주부리는 물개나 바다표범처럼 보입니다.
저는 산에서 진범 만나면 한참 들여다 봅니다.
이렇게 기묘하게 생긴 식물이 아무데서나 자라는게 너무너무 신기합니다.

알고보니 이게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만의 특산 식물이라고 합니다.
민간에서 오독도기라고 불러왔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진범이란 이름에는 어떤 유래가 있을까.
바다표범 모양과 연관이?

최근까지도 저는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에 젖은 범이니까 진범이라고 하지 않았겠나 정도로...
아이고... 근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진범'은 꽃 모양과 아무 상관이 없는 한자어랍니다.
게다가 어이없는 실수로 잘못 붙여진...
그 사연을 살펴보죠.


[진범, 2004.9.4 금대봉, Nikon D100, AF 24-85mm(D)]

때는 일제하 1930년대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제가 얼마전 이 사이트에 [금강초롱] 학명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식물학자 정태현 박사를 언급했었지요. 그 정태현 박사 등이 1937년에 [조선식물향명집]을 발간합니다. 우리 특산식물 오독도기가 이 책에서 진범이라는 우리말로 표기되지요. 그게 진범이란 이름의 첫 문헌상의 표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한글 진범에 병기된 한자표기입니다. 그 책에는 진나라진 秦과 풀 무성할 봉(초두 艸 밑에 凡)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실수죠. 범어 범(梵)자와 비슷해서 혼동한 것 같습니다. 이상은 인디카(http://www.indica.or.kr) 하늘타리님이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초두(艸) 밑에 凡은 발음이 [봉]입니다.
혹시 아래아한글 쓰시는 분들은 [봉]치고 F9 키 눌러서 한자 검색해보세요.
아래 캡쳐 이미지처럼 艸 밑에 凡이 뜹니다.



진봉이 맞는 표기라면 그 이름은 누가 붙였을까요? 식물 이름에 관한 조선시대 문헌을 섭렵해보면 아마 나오겠지요 뭐. 우리 아마추어는 거기까지만 ^^

아무튼 명백하게 잘못된 표기임에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불러온 이름 아니냐, 또다른 혼란을 불러올텐데 굳이 바로잡을 필요 있겠냐는 주장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냥 진범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도감중 작년 3월에 발간된 [야생화 쉽게찾기]에도 진범이라고 표기되어있습니다.
한번 진범은 영원한 진범이란 말인가!
진범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노릇이죠 캬캬~

도감 편찬자에 따라서는 진교(秦?)라고도 표기합니다.
이에 대해 용담과의 전혀 다른 약재식물 이름을 잘못 갖다 붙인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만, 역시 그냥 진범의 다른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식물 명명에 대해 누가 어떤 권위와 절차로 정하는 것인지,
제가 제대로 다시 알아봐야겠습니다.
스스로 확신이 설 때까지는 이 녀석을 계속 진범 취급하렵니다 ㅎㅎ

꽃 색깔이 하얀 녀석은 흰진범이라 하는데 별개의 종(Aconitum longecassidatum)으로 치나 봅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흰진범, 2003.8.8 남설악, Nikon E5700]

제 경우, 진범은 이달 초 금대봉에서 처음 봤는데
이상하게 흰진범은 더 자주 여러 곳에서 만났습니다.

 
[흰진범, 2003.9.21 천마산, Nikon E5700]

이렇게 보니 물개가 아니라 한 쌍의 백조 같기도 하군요.
뚱뚱한 백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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