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 정상 부근의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내려다본 풍경. 구불구불한 해안선과 아름다운 포구, 그리고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있다. 바다 너머로 보이는 곳이 거제도다.
# 한려수도를 끼고 오르는 케이블카가 새로 놓이다
경남 통영에는 도처에 미륵이 있다. 56억 7000만년 후에 비로소 이 땅에 내려와 석가모니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다는 미래의 부처. 통영항에서 차를 타고 통영대교 또는 충무교를 넘거나 혹은 걸어서 해저터널을 건너면 닿는 곳, 그곳이 바로 통영에서 가장 큰 섬인 미륵도다. 미륵도의 한가운데에는 또 미륵산이 솟아있다. 이 미륵산에 오르면 한려수도 풍광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관광엽서의 한려수도 풍경은 십중팔구 미륵산에서 찍은 것이니 더 말해서 무엇할까.
때로는 아름다운 풍광이 때묻은 마음을 씻어주기도 하는 법. 압도하는 자연 앞에서 왜소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미륵산 정상에 오르려면 빽빽하게 앞을 가린 편백나무 숲 가운데 들어선 절집 미래사에서 출발해 가파른 산길을 30분쯤 걸어올라야 한다. 그러나 오는 2월말부터는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9분 능선까지 오를 수 있다. 케이블카 건설 공사가 마무리돼 이즈음 시험운행이 한창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8분쯤이면 미륵산 9분 능선쯤인 상부 승강장에 도착한다.
왼쪽 창으로는 통영항, 오른쪽 창으로는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오르는 길이다.
상부 승강장에서 내려다보이는 거제도며 한산도의 모습도 좋지만, 여기서 5분쯤 더 올라 미륵산 정상에서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풍경은 말을 잊게 한다. 학림도와 비진도, 연대도, 욕지도, 두미도 등 이름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섬들이 바다 위에 빼곡하다. 맑은 날이면 쓰시마(對馬)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땀 한방울도 없이 케이블카로 훌쩍 올라서 이런 풍경을 만나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다.
# 해질녘 산양일주도로를 달리는 맛
미륵도에는 해안절경을 따라 나란히 뻗어있는 22㎞의 산양일주도로가 있다. 이 도로는 해질녘에 달려야 제 맛이다. 달아전망대가 있는 2㎞ 구간에서 만나는 붉은 노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푸른 하늘에 붉은 기운이 번지면서 만들어내는 거친 듯하면서도 몽환적인 색감은 섬에 걸린 해가 살짝 넘어간 뒤에 더욱 아름답다.
해질 무렵이면 해안도로를 달리던 차들은 모두 해안가에 늘어선다. 외지인들의 승용차는 물론이고, 공사장을 오가는 트럭, 털털거리는 경운기들까지…. 약속이나 한 듯 다들 차에서 내려 해안가 벼랑 앞에 선다. ‘바닷가의 낙조 풍경쯤이야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통영의 산양일주도로에서 만나는 노을은 다른 곳과는 이른바 ‘스케일’이 다르다. 게다가 통영은 1년 365일 중 맑은 날이 250일쯤이나 되니 어느 곳보다 더 쉽게 불타는 노을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달아공원으로 가는 산양일주도로에서 만난 몽환적인 노을 풍경. 해질 무렵 이 길을 지나다 보면 차를 멈추고 차를 멈추고 카메라를 꺼내 들 수밖에 없다.
산양일주도로에는 숨겨진 해안도로가 있다. 애초에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바다쪽에다 놓은 길이다. 복바위를 비롯해 기암괴석을 끼고 도는 이 길은 불과 2㎞가 채 못되는데다, 길이 다 만들어지지 않아 되돌아나와야 하지만 그 운치는 단연 으뜸이다. 달아공원과 영운초등학교를 한참 지나서 수륙쪽에서 오른쪽 길로 꺾어지면 만나는 길. ‘삼칭이 해안도로’란 이름이 붙어있지만, 아직 현지인에게는 수륙 ~ 일운 해안도로로 알려져 있다.
# 통영의 문화와 역사의 향기에 취하다
통영이란 이름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준말이다. 조선시대 해군 사령부 격인 통제영이 있던 곳이 통영 앞바다의 한산도다. 통영에는 충무공의 유적들이 즐비하다. 통영 중심가에 있는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인데 ‘세병(洗兵)’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글에서 따온 것. ‘은하수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닦아서 영원토록 쓰지 않길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세병관으로 드는 지과문도 ‘창을 거둔다’는 뜻이니, 통제영은 해군기지이지만, 호전적인 구호보다는 평화를 바라는 뜻이 더 간절하다.
근대로 넘어오면 통영은 예향의 향취가 물씬 풍긴다. 통영이 고향인 유치환 시인이 이영도에게 연서를 쓰던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은 통영중앙동우체국이다. 그의 시 ‘행복’이 적힌 조형물이 놓여있는 우체국 앞길은 ‘청마거리’로 명명돼있다. 조국과 불화한 음악가 윤이상은 미륵도를 ‘우주의 소리를 들은 곳’이라며 평생을 그리워했고, 시인 김춘수도 한려수도를 향한 통영을 자신의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고 했다. 그뿐이랴, 소설가 박경리도 시조시인 김상옥의 고향도 통영이다. 비록 고향은 아니지만 이중섭도 6·25 전란의 와중에 통영에서 머물며 ‘통영풍경’ ‘복사꽃 핀 마을’ 등을 그려냈다.
통영이 가진 어떤 것이 이들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주었던 것일까. 남망산 공원에 올라 둥글게 휘어져 있는 통영항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아늑하고 순한 바다. 이 바다가 예술가들에게 고향의 풍경으로 담겨 평생을 퍼올릴 샘이 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저 고향 통영을 시로 소설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의역해내고 또 직역해낸 것이 아닐까.
# 통영 주당들의 독특한 술문화…다찌
통영은 남자들끼리 가야 제격인 곳이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묵은 친구사이라면 더 좋겠다. 사실 가장들은 결혼 후에 ‘친구와의 여행’이란 언감생심이다. 생계를 책임지고, 가족을 건사하기 바쁜 가장들은 퇴근후 친구들과 오랜만에 갖는 술자리마저도 시계를 봐가면서 서둘러야 하는 형편이다. 하물며 친구와 여행이라니. 하지만 상상해보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술집에 마주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젊은 날의 추억이나 못이룬 꿈에 대한 회한을 털어놓아본다면…. 아마 서로에게 많은 위안과 격려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통영을 친구들과 가야 할 ‘남자들의 여행지’로 꼽는 이유는 단 한가지 ‘다찌집’ 때문이다. 다찌집이야말로 통영의 독특한 술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술집이다. 이곳에는 독특한 주문법과 계산법이 있다. 메뉴판에는 술 종류와 가격만 적혀있다. 소주 1병이 1만원, 맥주는 1병에 6000원, 기본은 무조건 3만~4만원을 맞춰야 한다. 술은 얼음이 채워진 플라스틱통에 담겨 나온다. 플라스틱통이야말로 ‘다찌집’의 불문의 원칙이다. 이 플라스틱 통이 없다면 그곳은 다찌집이 아니라고 해도 무방하다.
곧이어 안주가 따라나온다. 안주값은 이미 술값에 포함돼 있다. 무슨 안주가 나올지는 순전히 주인 마음. 조개, 돌미역, 새우, 가재, 멍게, 생선미역국, 꽁치구이, 생선회 등이 하나 둘씩 상위로 깔린다. 술이 한병씩 추가될 때마다 성게알, 해삼창자, 관자 등이 더해진다. 얼큰한 매운탕이며 바삭한 튀김까지, 죽 늘어놓은 안주에 기분까지 흐뭇해진다.
# 술 실력에 따라 달라지는 안주의 종류
술을 주문하면 주인이 내키는 대로 안주를 내오는 ‘다찌’집은 통영 인근에서만 볼 수 있다. ‘통영사랑 다찌집’의 1인당 2만원짜리 차림.
하지만 정작 다찌집 주인들은 외지인들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아니 반기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푸대접에 가깝다. 그건 통영 사람들에 비해 객지 사람들의 주량이 훨씬 못미치기 때문이다. 다찌집은 본래 4인기준 한 상에 소주 10병쯤은 들어가야 그날 준비된 안주의 90%쯤을 맛볼 수 있다. 1인당 소주 두 병 반인 셈이니 만만찮은 양이다. 하지만 객지 사람들은 기껏 소주 네댓 병 시켜놓고 대취해버리거나, 술은 더 주문하지 않고, 안주 욕심만 내니 주인 입장에서 반가울 리가 없다.
주량에 자신 있는 편이라면 ‘울산다찌집’에서 통영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다찌의 흥취를 맛보는 것이 낫다. 하지만 술 실력이 모자라거나 가족과 함께라면 ‘통영사랑 다찌집’이 제격이다. 이곳은 일단 고급 일식집을 연상케 할 정도로 깔끔하다. 술값 계산법은 똑같지만 기본 4만원짜리 상과 함께 1인당 2만원짜리와 3만원짜리 상을 준비해놓았다. 눈치를 보며 술을 더 주문하지 않아도 1인당 가격에 맞춰 주문하면 마음 편하게 안주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도 문제는 있다. 4명이 가서 1인당 3만원짜리를 주문하면 소주가 무려 12병이나 플라스틱통에 담겨 나온다.
# 술마신 뒷날의 해장까지 책임지는 통영의 먹을 것들
통영에 다찌집이 등장한 것은 아마도 바닷가 통영 사람들의 엄청난 주량 때문인 듯싶다. 주당들에게 관심은 안주가 아니고 술 자체였을 터. 그러니 술이 주인공이고, 푸짐한 갖가지 해산물로 만들어낸 안주마저도 술의 조연 역할밖에 못했던 것이 아닐까.
통영은 주당들이 많은 곳이니만큼 해장음식도 특출하다. 좀 과장해 말하자면, 술 좋아하는 통영 사람들의 맛있는 음식에 대한 평가는 딱 두가지다. 하나는 ‘술안주로 좋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해장에 그만이다’는 것이다. 술안주로 좋은 음식을 내오는 곳이 다찌집이라면, 해장음식으로 첫손 꼽히는 게 서호시장통의 ‘원조시락국집’에서 내놓는 시락국이다. 시락국이란 시래깃국의 사투리. 하지만 이곳의 시락국은 다른 지방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장어머리를 고아낸 국물에 된장을 풀고 무청을 넣어 끓여낸다. 산초(제피)가루와 김가루, 잘게 썬 고추와 부추무침을 입맛대로 넣어 먹는다. 뜨끈한 국물이 맵싸한 산초가루의 향과 어우러져 시원한 맛을 낸다. 막걸리 한 잔과 함께라면 더 좋다.
통영에는 졸복국도 유명하다. 작은 붕어 크기의 졸복을 넣고 미나리, 콩나물과 함께 끓여 내놓는 졸복국은 밋밋한 듯하면서도 깔끔하고 시원한 맛을 낸다. 서호시장의 ‘만성복집’의 졸복국 맛은 인근에서 알아주는데, 졸복국을 주문하면 뼈째 썰어낸 병어회와 싱싱한 굴무침을 반찬삼아 내놓는다.
# 다른 곳에는 없다… 통영에만 있는 음식들
통영에서만 볼 수 있는 기상천외한 음식이 바로 ‘우짜’다. 밤이면 통영 곳곳에 들어서는 포장마차에서는 ‘우짜’를 내놓는다. 우짜란 ‘우동’과 ‘자장’을 합친 이름. 멸치를 닮은 밴댕이(디포리)를 넣어 우려낸 국물로 국수를 말고, 그 위에 자장을 얹은 뒤 후추와 고춧가루를 뿌려 내온다. 우동을 먹자니 자장이 먹고 싶고, 자장을 먹자니 우동이 먹고 싶다는 손님을 위해 아예 그 둘을 섞어버렸다는 게 우짜의 원조로 꼽히는 분식집 ‘향남우짜’.
익숙지는 않지만 독특한 맛이 생각보다는 괜찮은 편이다.
선뜻 동의할 수 없지만, 서씨는 ‘우짜가 해장에 좋다’고 주장한다.
통영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적십자병원 뒤편 ‘오미사’의 꿀빵을 잊지 못한단다. 오전 10시쯤 문을 여는데 그날 팔 분량만을 만들어 오후 서너시면 다 팔고 문을 닫는다. 꿀빵은 팥소를 넣어 튀겨낸 빵에 끈적끈적한 시럽에다 깨를 뿌려낸다. 앞치마를 한 주인 할아버지가 정성껏 빵을 빚는 풍모가 ‘장인’을 연상케 한다. 통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충무김밥. 인기가 시들하긴 하지만 ‘뚱보할매김밥’의 충무김밥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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