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5년, 일본에게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당한 해였다.
당시 선교사로 온 미국인
질레트(P.Gillett:한국명 길례태 吉禮泰)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그 시초다.
1911년 평양 선천 등지로 원정 경기에 나선 황성 YMCA야구단의
모습. (연합뉴스)
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길례태 선교사.
길례태 씨는 선교 목적으로 한국을 찾았다가 한국 야구 보급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길례태 씨는 이후 일제의 독립운동가 탄압에 항의하다 추방당한다.
이후 서울의 보성고등학교, 오성학교, 경신학교, 배재학당, 휘문 등 여러 야구팀이 조직되어 1911년 11월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팀이 처음으로 일본원정에 올랐다.
1922년엔 전조선군과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야구단 초청 경기가
있었는데, 철도구장에서 경기를 해 21:3으로 대패.
1923년엔 조선야구협회가 창립되어 한국 야구가
비로소 본궤도에 올랐다. 1926년에는 동아일보사 주최로 제1회 4구락부, 즉 중앙·경신·서울(배재)·고려(휘문) 간에 리그전이 열렸다. 이
경기는 경성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치러졌는데, 서울이 전승으로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치하의 한국
야구는 결국 1938년 일본인들이 조직한 조선체육협회에 흡수됨으로써 주체성을 잃고 만다. 한국 야구는 이후 1980년까지 단
한번도 일본과 대등한 경기조차 펼치지 못한 채 국제 무대에서 2류 대접을 감내해야 했다.
1945년 10월 15일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 야구인들은 조선야구협회를 다시 조직하였다. 조선학생야구연맹과 한성실업야구연맹이 탄생했고, 제1회 4도시대항전도 창설되었으며, 6월에는
제1회 전국도시대항 야구대회가 열리고, 7월에는 제1회 전국야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1953년 조선일보사에서 청룡기 야구
대회를 부활시켜 한국 야구는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봉황기, 대통령배 이렇게 4개의 고교 야구 대회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동아일보 황금사자기 배너. (동아일보사)
청룡기와 함께 대한민국 야구의
역사를 대변하는 가장 오래된 대회로,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의 수많은 야구 천재들이 배출됐다.
한국의 4대 고교 야구는 모두 신문사가 주최했다. 조선일보사의 청룡기 대회(1946년), 동아일보사의
황금사자기 대회(1947년), 한국일보사의 봉황대기 대회(1971년), 중앙일보사의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1967년).
4대 고교 야구 대회는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 야구 붐을 일으켰으며 오늘날에도 한국 야구계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고 있다. 구대성, 이승엽, 서재응,
김병현, 김선우, 이종범, 봉중근, 최희섭 등 대다수의 프로야구 스타들이 4대 고교 야구 대회 우승의 주역들이었다.
1954년 11월 5일 대한야구협회가 세계야구연맹에 정식으로 가입, 국제 대회 참가자격을 얻는다. 1963년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강호 일본을 누르고 한국 야구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이는 한국의 국제대회에서 처음으로 거둔
성과였지만, 아마추어 야구 대회로 프로팀 간의 최강 전력으로 붙은 것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한국은 아마추어 야구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다시 한번 우승의 영광을 안는다. 1977년
대륙간컵 국제야구대회에서 세계의 강호인 미국·일본·중남미 여러 나라를 누르고 우승, 그리고 1982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7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1977년 국제 대회 우승은 김응룡 감독이 이끌었고, 이는 당시 전국에
엄청난 경사 거리였다.
우승을 한 한국 대표팀은 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1980년 일본에서 열렸던 세계 선수권 대회. 현재 도쿄돔의
전신, 고라쿠엔구장에서 한국대표팀 대 일본 대표팀이 맞붙어 극적인 6-4 역전승을 펼친 경기였다.
김응룡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한국은 1회말 선발 최동원이 솔로홈런을 내주는 등 2회까지 홈런 3방을 내주며 3-0으로 끌려갔다. 3회 구원등판한
이선희가 남은 이닝을 산발 6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는 사이 기적같은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3-1로 뒤진 7회초 무사만루에서 김일권의 좌익선상
2루타,김용희의 내야안타로 4점을 뽑아낸 한국은 5-3 승세를 굳히고 결국 역전승했다.
이는 한국야구 100년 사상 국가대표간
대결에서 유일한 도쿄에서의 승리였다. 한국은 풀리그로 치러진 이 대회에서 9승2패로 쿠바에 이어 일본과 함께 공동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1982년 서울에서 다시 벌어진 세계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한국은 다시 한번 기적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당시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온 국민들은 반일 감정을 불타고 있었다. 전 국민이 한일전 만큼은 필승을
다짐했고, 대표팀은 엄청난 부담을 지고 경기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2대1로 끌려가던 우리 대표팀은 8회말
김재박의 기가 막힌 번트 안타(일명 개구리 번트)로 동점에 성공, 이어 한대화가 왼쪽 담장을 넘기는 어마어마한 역전
3점 홈런을 때려내며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우승컵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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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 하일라이트. (출처:
KBS)
일본에 맺힌 한을 시원하게 풀어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
한대화 선수의 쓰리런 홈런에 온 국토가 감격에
들썩였다.
1982년 6개 구단으로 프로야구가 출범. 미국보다는 100여 년, 일본보다는 약 50여 년 늦게
출범했다.
서울은 MBC청룡, 부산·경상남도는 롯데자이언츠, 인천·경기도·강원도는 삼미슈퍼스타스, 충청남도·충청북도는 OB베어스,
전라남도·전라북도는 해태타이거스, 대구·경상북도는 삼성라이온스 등이었다.
이 가운데 삼미슈퍼스타스는 청보핀토스에서 태평양돌핀스로
바뀌었으며, OB베어스가 서울로 올라오는 대신 충청남도·충청북도는 빙그레이글스가 연고지로 삼았다. 또 MBC청룡은 1990년 LG트윈스로
바뀌었고, 전라북도지역은 쌍방울레이더스가 참여하여 1992년에는 8개팀이 되었고, 1996년에 태평양돌핀스가 현대유니콘스로 바뀌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윤동균 선수의 대표 선서.
1982년 22승을 올린 OB 베어즈의 불사조 박철순
지금도 깨지지 않는 4할 타율의 기적을 일으킨 프로야구 원년 멤버
백인천
1983년 한해 30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장명부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위해 한국 야구는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포함하는 일명 드림팀을 구성,
결승에서 숙적 일본을 무려 13대1, 7회 콜드게임으로 꺾는다.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투구를 하는
박찬호 선수
박찬호 선수를 비롯한 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이때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았다
프로야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뒤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경기대회에서는 동메달을
획득.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본은 2년 전 치욕을 씻기 위해 괴물투수 마쓰자카를 한국전에 기용했으나, 이승엽의 예선 2점 홈런,
그리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결승 2루타을 날리며 대활약, 일본을 다시 한번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이때 구대성은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7이닝 동안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고, 동메달 결정전에선 일본의 괴물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9회까지 맞붙어 단 1점을
내주면 완투승을 거두며 "일본 킬러"로 떠올랐다.
2000년 9월 27일, 숙적 일본을 3-1로
격파한 한국.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김응룡 감독을 하늘 높이 띄우고 있다.
그리고 2006년.
1970년대까지 식민 치하와 전쟁, 가난에 허덕이며 굳세게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 야구, 프로 출범 24년만에 세계 최강 미국을 꺾는 기적을 연출한다.
이제 세계 정상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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