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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피카소가 그린 한국전의 대학살

Sosahim 2006. 6. 22. 05:41

 
  인류애적 동정심으로 충격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문제작 <한국에서의 대학살>
 `게르니카`에서와 마찬가지로 밝은 금속성 회색을 주조로 하여 노랑과 녹색이 연하게
  채색된  단색조의 그림이며, 죄없는 희생자들이 적의 공격앞에 아무런 대응도 못한 채
  쓰러져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1950년 북한 군대가 38선을 넘어 남침, 수도 서울을 장악한 후 남한에 미군이 개입하자
일어난 참상에 당시 파카소가 받은 영감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로버트와 같은 인간들이 벌거벗은 남녀의 무리를 향해 총격을 가하고 아이들이 겁에 질려
뛰어 도망가는 모습은 일정한 시대를 초월한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공산주의를 절대적 희망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해 매우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사르트르는 공산당 기관지를 통해 북침설을 주장했고 남침설이
사실로 확인된 후에도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다.

 지식인 사회의 친 공산주의적 분위기에 부화뇌동한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구 소련은 공산당원이 된 천재화가를 부추겼고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작케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 그림은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혹독한 비평을 받았고 결국 프랑스 공산당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을 못마땅하게 여긴 대표적 국가는 미국이었으나 프랑스 공산당 역시 그림을 칭찬하지 않았던 이유는 살인자의 실체가 불분명하게 표현된 점 때문이었다.

 이 대작 속에는 전쟁의 참혹함과 황폐함이 우화적으로 표현돼있으나 중세 풍의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여자와 어린이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소재는 반미적이라고 할 만한 특정요소가 없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일부에서 1950년 10월 미군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에서의 대학살>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 바로 황해도 "신천리 학살"이다.
북한측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52일간 신천을 점령하던 중 신천군 인구의 4분의1에 해당하는 3만5천383명의 양민을 학살했다는 선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해석이 국내에서만 거론되는 잘못된 주장이란 의견을 내놓는다. 1950년 10월13일, 유엔군과 국군이 신천에 진군하기 전 반공청년 수백 명이 무장봉기를 감행해 신천을 장악했는데, 이러한 봉기로 인한 좌·우익간의 충돌로 수천 명이 사망한 사건이 "신천리 학살사건"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므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등과 같이 한국전쟁시 미군이 가담한 사건들이 분명히 존재하긴 할 것이나 신천리 학살사건이 미군의 만행이라고 단정지을 명확한 근거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 객관적 결론이다.

 생전의 피카소는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자신의 그림은 공산주의자의 그림이라는 말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피력했다.
그는 공산당에 자금을 지원했고 레닌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스탈린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한
열혈 공산당원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그가 화가로서 존립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리하여  피카소는 중립적 시각으로  특정한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고 반전이라는 메시지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1937년 그가 콘도르 군단에 의해 폭격된 바스크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의 참상을 고발했던  작품 <게르니카> 이후 또 한번 폭력의 잔혹성에 분개한 피카소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