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 북한강 최상류, 외롭게 서 있는 ‘꺼먹다리’는 슬픔과 아름다움, 향수 등 다양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화천읍 대이리 463의 3번지에 위치한 꺼먹다리는 화천읍에서 평화의 댐과 백암산 DMZ 권역, 최전방 지역을 잇는 지방도 461호선에 올라 화천 댐과 헌병 검문소를 지나면 만날 수 있다.
꺼먹다리를 지나면 도령과의 사랑에 얽힌 슬픈 전설의 터 처녀고개가 딴 산 피서지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이 같은 지리적 특혜로 영화나 TV 드라마 등의 단골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 유명한 영화 ‘전우’와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등의 배경이 된 ‘꺼먹다리’에 올라 북한강을 바라보면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도 연상된다.
다리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강바람을 맞고 있으면 옛 추억의 장면이 떠올라 쉽게 자리를 뜰 수 없다.
화천을 묵묵히 지키며 환갑을 넘은 다리, 파란만장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꺼먹다리를 한국전쟁 당시 이 곳 전투에 참전한 김달육(80·화천읍) 옹과 함께 찾았다.
꺼먹다리는 화천의 근현대사를 목격한 산 증인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주요시설 확보를 위한 최대 거점 적전지였던 파로호와 화천 댐, 지금은 DMZ로 변한 백암산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이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김 옹은 지난 50년 9월 1차 북진 당시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으로 꺼먹다리와 조우했다.
당시에는 콘크리트와 철근 등으로 만든 다리가 지역에는 없어 주민들의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유명했으며 전방 보급에 중요한 교량이자 유일한 보급로인 관계로 1개 중대 병력이 다리를 통제했다고 한다.
한국전 당시 중동부전선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인 만큼 전투도 치열해 김 옹이 이곳을 지나 북진할 당시 중공군, 북한군, 아군 등의 시체가 산을 이뤄 불도저로 밀어내며 진군을 했다고 한다.
지난 45년 건설된 꺼먹다리는 수풍댐과 함께 한국 근대산업을 이끈 전초기지 화천발전소 건설당시 자재 운반을 위해 설치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리는 폭 5m, 길이 204m 규모로 전체적인 모습은 단순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철근 콘크리트 주각위에 각재를 덧댄 가구 식 구조로 상판인 나무에 검은색 타르를 칠해 ‘꺼먹다리’라고 불린다.
화천수력발전소와 함께 건립 당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꺼먹다리는 해방 전 일제가 기초를 놓고 한국전이 일어나자 소련군이 들어와 교각을 놓은 뒤 휴전 후 화천군이 상판을 놓아 완성된 구만교가 준공되면서 지난 81년 폐쇄됐다.
이 후 등록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된 꺼먹다리는 난간도 없고 일부 침목이 훼손돼 수십 년간 방치되다 최근 문화재청으로부터 복원에 대한 설계변경을 승인 받아 정비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이 다리아래 큰 골 천은 피서객들로 한여름이 성가시고, 다리건너 수리봉지구의 전승을 기념해 세운 643고지 전투전적비는 참전용사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화천발전소는 일제하인 1939년 7월 한강유역의 전원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한강수력전기(주)가 북한강을 가로막아 총저수량 10억2천만톤의 거대한 댐공사를 기공하여 1944년 10월에 준공을 보았다.
동년 5월에는 제1호기, 10월에는 제2호기를 설치 완료하여 발전을 개시하였고, 제3호기는 수차 일부를 설치하던 중 8.15 해방을 맞이하여, 일본인들이 철수 후 발전소는 북한에 의해 운영되다가, 1950년 6. 25사변이 발생하여 동년 10월 수복과 함께 11월 8일에는 제1호기가 시운전에 들어갔으나 11월 11일에 적 치하로, 11월 20일 재탈환, 12월 25일 또 다시 적의 치하로 들어갔다가 다음해인 1951년 4월 완전수복 하기까지 발전설비가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하였다.
또한, 복구공사도 순조롭지 않았고, 혹심한 전쟁재해와 장기간 방치한 시설은 거의 전파되었거나 사용불능 상태였고, 발전소가 38선 경계에 인접한 관계로 전황귀추에 따라 공정이 지연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고, 휴전이 될 때까지 군요청에 의해 주요 기기를 소개한 상태에서 하류에 위치한 청평발전소의 수위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수저항기를 이용하여 방류시키고, 휴전회담의 성패가 어느정도 예견됨으로써 복구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52년 3월 본격적인 복구공사에 착수하여 동년 11월 25일 정부융자에 의한 복구 자금 25억 1,757만환을 투입하여 제1호기의 복구를 완료하여 27,000㎾의 출력발생이 가능했고, 1953년 5월 20일 제2호기의 복구공사에 착수하여 공사비 6,900만환과 연인원 55,600명을 동원하여 1954년 7월 22일 준공하여 가능출력은 54,000㎾로 증가 되었다.
이후, 1954년 7월 9일 I.C.A의 원조자금으로 1955년 8월에 미국의 M.K 사와 계약을 체결 공사에 착수하여 일정시 건설이 중단되었던 제3호기의 증설과 더불어 제1, 2호기와 불비한 제기기 보수공사도 겸하여 시행하여 1957년 11월 25일 연인원 70만명과 내자 21억 5,800만환, 외자 900만달러를 들인 전후 최대의 공사로 제3호기 증설준공과 함께 기능출력도 81,000㎾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1966년 긴급전력대책의 일환으로 계획된 제4호기 증설공사는 1966년 7월에 착수했는데, 기확보된 수로설비 및 발전소 건물등이 확보된 상태였으므로 수차발전기, 부대기기의 설치, 수압철관 연결로서 완성이 될 수 있는 공사였다.
1966년 7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1968년 6월 30일 관청시험을 거쳐 상업운전을 하게 되었으며, 공사비는 외자(K.F.X) 90만 4천달러, 내자 1억8천2백만원이 소요되었다. 이로서 제4호기 준공과 함께 발전소의 가능출력은 108,000㎾, 연발전량은 326GWh로 증가되었고,제1,2,3,4호기는 일본 Hitachi 에서 공급한 27,000㎾의 입축 프란시스형 수차발전기가 설치되게 되었다.
1985년 2월에 착공하여 1986년 1월 6일에 준공된 한강계 수력발전소 원격감시제어화 공사는 수력발전소를 원방제어하기 위한 기존의 기계, 전기설비를 현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화천발전소는 건설이후 오랜기간 운영하면서 노후된 설비들이 많아 연차적인 보수공사와 설비를 현대화하고 있으며, 하류의 여러발전소와 함께 전력공급 및 전력계통 시송전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댐수로식발전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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