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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정도리 구계등

Sosahim 2011. 2. 13. 21:12

 

 

구계등(九階燈)은 갯돌 층이 바다 속까지 아홉 개의 계단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파도에 닳아 동글동글한 청환석(靑丸石)이 차곡차곡 쌓인 반달 모양의 해안은 시간의 전시장이다. 구계등 수평선에는 청산도와 보길도가 떠있고, 띠를 이룬 방풍림에서는 사철 초록물이 뚝뚝 떨어진다.

국가명승 제3호로 지정된 정도리 구계등으로 가려면 완도대교를 건너야 한다. 윤대녕 소설 '천지간'에서 외숙모 문상을 가던 주인공이 버스터미널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한 여인과 함께 건너던 그 다리다. 완도대교 옆의 낯익은 트러스트교는 1968년부터 85년까지 이용되던 다리. 한국전쟁 때 폭파된 한강철교의 철구조물을 이설해 조립한 다리로 섬이었던 완도를 뭍으로 바꾼 주인공이다.

구계등은 그 신비로운 모습을 단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300년 역사의 방풍림이 베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정도리 방풍림은 주민들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태풍과 해일, 그리고 염분으로부터 농작물과 삶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했다. 본래는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동백나무 소사나무 서어나무 다정큼나무 등 40여 종의 난대성 식물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렸다.

다도해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숲을 가로지르면 바로 구계등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왕복 1.2㎞ 길이의 고즈넉한 숲길을 에둘러 걸어야 참맛이다. 이름표를 목에 건 나무들이 도열한 숲길은 낙엽이 쌓여 양탄자처럼 폭신폭신하다.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초록 이파리 사이로 갯돌 구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길이 800m, 폭 80m 넓이의 구계등 앞에 서면 먼저 귀를 열어야 한다. 갯돌 구르는 소리가 갯돌 크기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수박 크기 갯돌이 쌓인 왼쪽 해변은 큰 파도가 칠 때 바다 속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난다. 하지만 참외 크기 갯돌과 달걀이나 밤톨만한 갯돌이 구르는 오른쪽 해변은 바닷물이 쓸고 나가면 바지락 씻는 소리를 낸다.

천상의 화음을 연출하는 이 많은 갯돌은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구계등의 역사는 1만여 년.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100m 이상 상승하면서 바위도 함께 밀려왔다고 한다. 그 후 태풍과 해일에 의해 바위 절벽이 무너지고 파도에 구르면서 닳고 닳아 동글동글한 갯돌로 변했다고 한다.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구계등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태풍이나 해일이 밀려와 바다를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2004년에는 태풍 '매미'가 구계등을 강타하면서 갯돌이 모두 사라지기도 했다. 갯돌이 사라진 모래해변에는 조선시대 상평통보가 다량 발견되었다. 아마 해저 침몰선에서 흘러나온 것이리라. 바다는 꼭 열흘 만에 구계등의 갯돌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구계등 갯돌은 비가 오거나 큰 파도가 치는 날에 더 환상적이다. 안산암 유문암 응회암 등으로 이루어진 갯돌은 푸른색 붉은색 회색을 띠지만 물에 젖으면 검게 변하면서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청산도에서 해가 뜨거나 횡간도로 해가 질때 붉은 햇살을 머금은 갯돌의 자태는 한 폭의 그림.

하루 중 구계등 갯돌이 가장 운치 있는 때는 '천지간' 주인공이 걸었던 달밤이 아닐까. 실오라기 같은 달빛을 흡수하면 수박만한 갯돌은 초승달처럼 빛나고 밤톨만한 갯돌은 별처럼 반짝인다. 갯돌과 파도가 사그락 사그락 밀어를 나누는 밤바다의 풍경마저 더해져 구계등은 환상의 세계를 연출한다.

구계등에서는 가슴을 활짝 열어야 한다. 자살을 생각했던 소설 속의 그녀도 동글동글한 갯돌이 서로 어우러진 구계등에서 가슴 속의 응어리를 풀었다. 태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오는 험한 바다에서 모난 돌들은 고운 화음을 낼 수 없다. 사람들이 구계등 갯돌 사이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 가지 아래서 갯돌 구르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