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앤디 와홀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는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1960~
이탈리아 출생인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90년대 초부터 국제적인 "악동"이자 코믹한
인물로 미술계 사람들을 끊임없이 놀라게 한 작가다. 그의 작업은 예측할 수가 없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예술가가 되기 전에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유머와 겸손함이
있는 희비극적 요소에 관심이 있다는 그는, 풍자와 유머가 담긴 사건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태리 밀란에서 가장 오래된 고목에
실물처럼 보이는 플라스틱 어린이들 세명의 목을 매달아 놓은 해괴한 조형물
이를 "미적 가치관의 고문" 이라며 한 남성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톱으로 이 조형물을
잘라내던 중 나무를 보호하는 철제 난간 위로 떨어져 크게 다쳤다. 사건 직후 밀란시 경찰과 소방관들은 나무에 남은
마지막 조형물을 잘라냈다고 한다.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가구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그는 1994년 뉴욕의 갤러리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 때 살아 있는
당나귀 한 마리를 설치하였다. 동물애호가협회의 반대로 개막 며칠 후 문을 닫아야만 했던 이 전시에서 그는 샹들리에가
설치된 우아한 천정에 달려 있는 당나귀 모습이 자화상과 같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환경 속에 던져진
자신의 모습이며, 숨막히는 그러한 분위기를 부수고 싶은 충동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저의 동물 작업에서는 섬뜩한 느낌이 나지요. 좀 더 겁나는
일은 이제는 더 이상 동물로 작업하지 않고 인간들과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실주의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어요. 그것보다는
판타지·우화·만화 등을 생각합니다. 친구 같은 동료의식이랄까…. 제가 쓰는 모든 박제된 동물들은 친구들이고, 저의 다른 한쪽이고(my
doubles)이고, 여분(extra)의 제 자신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제 동물들은 저의 다른 얘기들의 등장 인물들이었고, 이
얘기들은 제 머릿속에서 혼자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만약 이 동물들에게 초사실주의적(hyper-realistic) 성격이 있다면,
그들이 꿈이나 얘기와 같은 내용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실적이지만 삶보다는 가볍게
느껴집니다."
이 사건 이후, 그의 기이한 행동은 전시가 개최된 세계 각국에서
계속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그룹전에 출품할 작품을 근처에 위치한 갤러리에서 훔쳐와 <Another Fucking Ready-made>라는 제목으로 전시하였다. 예술이란
이름 아래 모든 것이 용납될 수 있는가라는 논란을 들끓게 했던 이 사건은 경찰의 개입으로 수습된 후에야 일정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사실상 선동적인 도전은 항상 우연히 따라오는 것이지 계획된 것은 아닙니다.
제 작업의 여러가지 상황은 마치 대화할 때 웃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오해하거나 틀린 대답을 할 경우가 있듯이, 제 작업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측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면 그것은 다만 규칙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지 결코 규칙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는 할 수
없지요. 만약 규칙을 미리 알았다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모든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겠죠. 도전이나 도발은 우리 모두가 어딘지 미숙하고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영원히 적절한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1998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그에게 젊은 작가를 위해 할당된 작은 공간인 프로젝트
룸(Project Room)의 전시를 제안해왔을 때, 그는 다수의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미술관 입구에서, 실물의 3배
정도로 확대 제작한 피카소의 두상 인형을 배우에게 쓰게 한 뒤 미술관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두상을 쓴 배우는 현대미술관 앞을 지나는 행인들과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가운데,
그 당시 개최중이던 잭슨 폴록의 회고전에 온 수많은 관객들을 악수로 맞이했다. 그가 젊은 작가들에게 할당되는 프로젝트 룸을 거부한 것은
기존의 미술관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의 황당 시츄에이션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상의
재단을 만들어 작가들에게 상을 수여하면서 1년 동안 작업하지 않는 조건을 제시한다든가, 자신에게 할당된 전시 비용으로 기금을 만들어 다른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과 같은 이벤트를 하기도 했다. 또한, 처음으로 캐리비안
비엔날레(Caribbean Biennial)를 조직하면서 "제6회 캐리비안 비엔날레"라는 엉뚱한 전시명을 붙이는가 하면, 비엔날레에 초청된
10명의 작가들에게 작품을 받는 대신 그들을 캐리비안 해안으로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제 생각에 예술이란 항상 베푸는 관대한 것이지요. 제 작업은 상황들이 끝없이 바뀌고 다른 식으로 보일
수 있으며 행복도 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결과적으로 보는 것은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이지요. 위에서 언급된 프로젝트들은 부의 분배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다시 재분배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들의 기본이 되는 생각이었어요. 빵집에 가서 빵 한 덩어리를 사는 것만큼 간단한 것이지요. 이러한 기본적인
교환에는 온갖 종류의 복잡함이 등장합니다. 관례적인 작은 모욕들을 일상 생활에서 참아내야 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뭔가 받아내려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야 하고 상대가 친절한지 공격적인지에 따라 목소리 톤을 바꾸고… 누구는 특권을 누리고 누구는 특권을 누리는
자에게 당하기도 하고…. 제가 하는 일은 이러한 모든 상황들 앞에 거울을 설치해 놓는 것이지요. 가끔은 거울을 없애보기도 하고,
거울이 없어지면 우리는 완전히 빈 것을 응시하게 되고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하게 됩니다."
이 중 가장
커다란 관심을 끌었던 것은 마우리지오 카텔란 자신이 축구팀을 만들었던 일이다. 1990년 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건너 온 불법 노동자들을 모아
"AC Fornitur Sud"라는 축구팀을 조직한 그는 축구팀의 스폰서로 "라우스"(Rauss -
독일어로 "나가"라는 뜻인데, 나치들이 유태인들에게 슬로건처럼 사용하던 말이다. 요즘에는 이민 온 외국인들을 모욕하는 뜻으로
쓰인다)라는 가상의 운송회사를 만들어 선수들에게 라우스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게 했다. 이 축구팀은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개최된 아트 페어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이 당시 이민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던 무렵이어서 그의 축구팀은 정치성을
강하게 띤 프로젝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내가 작품을 만들었다’라고 얘기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작업의 초기에는 무엇인가를 하면서, 또는 부스러기·조각·파편 같은 오브제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우리 집 주변에 그것들을 남기곤 했어요. 그 이후 낯선 도시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에서는 친구가 많지 않아서 뭔가 주섬주섬 거둔다는 것이
혼자서 두서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었지요. 빈 방에 혼자있는 외로움을 참아내는 방법이라고나 할까…. 제가 처음으로
전시했던 작업은 달력이었는데, 날짜·월·일 대신에 언제나 ‘오늘’이라고 써 있는 달력이었지요. 이것은 마치 제1과 : 삶을 꾸려나갈 방법을
어떻게 다루는지 배워라라는 과제처럼 일종의 연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개막식 기간에 일정한 시간 동안 수도승을 땅속에 묻는 작업. 개막식이 끝난
후에는 모래흙으로 덮어 놓은 바닥에 수도승이 묻혔다 떠난 자국만 남겼을 뿐 그곳에서 그러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설명이나 표식이 전혀
없었다. "이 작업은 수도승이 땅 밑에 묻혀 있다는 것과 그것의 흔적, 이 두 가지에 관한
것이에요. 저는 수도승이 증발했거나 지구 속으로 빨려들어 갔거나 어머니 자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이 작품의 제목이
<어머니>이듯이요. 개막식에 오지 않은 일반 관람객이 사실상 미술계 인사들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퍼뜨리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비추는 거울을 새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통로를 거친 정보나
이런저런 생각을 거친 상황에 의존하기 쉽지요. 그러나 분명하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무의식의 공통 언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제 작업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지요. 수도승 작업은 사실상 이러한 다른 관점들과 나눌 수 있는 공통 분모의 얘기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자란 사람이면 (불행하게도) 누구라도 종교와 뒤틀린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죄의식과 권력자, 이 두 가지는 우리의 피 속에 새겨져 있지요. 신이라는 단어는 거의 어머니라는 단어와 동의어이고, 신은
가족의 일부입니다. 이탈리아인에게 신은 또다른 지배이자 사랑이기도 합니다. 제 자신은 다만 이런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미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해요. 미니멀리즘도 잭슨 폴록도 종교적이었죠. 앤디 워홀도
종교적이었는데 그는 돈과 명예를 숭배했지요. 요셉 보이스는 거의 신부나 다름없었고…. 저는 이런 일종의 완벽성을 열망할 수는 없어요.
저나 제 세대의 많은 작가들에게 종교는 실패·분실·죄의식 이런 것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을 모욕하거나 신교도를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두 종교 모두에 희생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제
경우도 일종의 희생이었고 연약함을 보여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살과 고깃덩이로 존재하는 교황이라는 점에서 제 작품이
3차원으로 표현한 베이컨의 회화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제 작업은 단지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상의
여분을 남기는 것이지요. 관객들은 제 작업을 보면서 좋아할 수도 있고 화를 내거나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관객들이 제 작업을 보는
순간 갖게되는 어떤 이미지들을 미술관을 나온 후 집에서도 떠올린다면 제 작업은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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