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의 여행은 제대로 된 여행이었다. 영호남의 선비들이 강원의 금강산이나 함경의 묘향산을 구경할 때는 몇 달 걸려 다녀왔다. 날마다 출근하는 근무지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쉬엄쉬엄 가다 머무는 여행을 반복했다. 99칸짜리 명문가에 부탁해 숙식을 해결하며 산천을 주유했다. 지금 같은 여행에서 어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등 여행 명문이 나올 수 있겠는가. 다 느린 여행 덕택이었을 것이다. 조선 조정이 외적의 침입을 염려해 오가는 사람이 서로 피할 정도의 길을 내는 것만 허가했을 정도로, 여행길도 넓지 못했다. 옛 묵객들의 여행과 오늘날 도시인들의 ‘웰빙 여행’이 접선하는 곳으로 계곡 여행만 한 게 없다.
계곡은 인생여정을 닮았다. 산 정상 부근에서 조그마하게 분출돼 계류를 만들었다가, 양이라도 넘치면 주변을 감싼 산을 삼킬 듯 소용돌이친다. 자신을 감싼 소(沼)를 만나면 이내 숨을 죽이고 다음 단계를 생각한다. 도시인들이 계곡에 발 담그고 가족과 세상의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는 것도 어쩌면 옛 선비의 풍류만큼 잠시의 여유를 선사한다.
수도권에서는 남한강 주변 계곡이 유독 눈에 띈다. 양평군 용문산 동쪽 줄기의 중원계곡과 중원폭포는 중원산과 도일봉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줄기다. 숲이 울창해 가뭄과 홍수에도 유량의 변동폭이 작다. 중원폭포의 높이는 10m. 폭포 주변은 절벽과 넓은 바위가 주위를 감싸안고 있으며, 폭포 아래는 천연의 수영장이 피서객을 맞이한다.
용문산과 유명산 사이의 어비산 자락을 감싸고 도는 어비계곡은 가평군 설악면의 자랑이다. 수도권 쉼터로 유명한 유명산 휴양림 입구를 찾는 것에서 어비계곡 탐방은 시작된다. 검은 바위와 하늘을 가린 잡목을 배경으로 맑은 물이 계곡을 감싸안는다. 계곡의 물고기가 날아다닐 듯 경쾌하다 해서 ‘어비(魚飛)’란 이름이 붙여졌지만, 지금은 계곡의 물이 양이 적다.
경기 북부에서 피서철 계곡으로는 백운산 자락의 백운계곡과 선유담을 꼽는다. 백운계곡은 경기 북부의 ‘경춘가도’라 할 만큼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맑고 깨끗한 물이 모이는 선유담은 아름다운 골짜기로 손색이 없다. 주변에 음식점이 많은 약점은 광암정과 학소대 등의 명소에 가리게 된다.
충북 영동군 상촌면의 물한계곡은 충청 지역에서 손꼽히는 계곡이다. 한낮에도 햇살을 보기 힘들 정도로 천연림이 우거진 생태계의 보고다. 물이 차다고 해서 일명 ‘한천계곡’으로 불리는 이곳은 민주지산을 비롯해 크고 작은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해져 길이 20㎞의 아름다운 계곡을 만든다. 황룡사에서부터 무지개소로 불리는 용소에 이르는 구간이 가장 아름답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지리산 피아골과 경남 산청군 산장면의 대원사 계곡은 민족의 아픔을 몸소 체험한 지리산의 계곡들이다. 각기 호남과 영남을 대표하는 계곡이기도 하다. 피아골은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한 물을 섬진강으로 연결하는 계곡이다. 명칭은 예전 이 일대에 피가 많아서 ‘피밭골’이라 부른 데서 유래됐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등 큰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짙은 녹음에 시원한 계곡 물소리의 매력은 여전하다.
산청의 대원사 계곡은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남한 제일의 탁족처로 꼽은 곳이다. 1960년대까지 화전민이 살았던 대원사 계곡도 지리산의 피아골처럼 빨치산이 기승을 부린 시절, 낮과 밤의 주인이 달랐던 곳이다. 행정 명칭인 ‘유평계곡’ 대신 대원사 계곡으로 부른는 이유 또한 대원사가 겪은 아픔을 기억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현무암 지대로 물이 귀한 제주도에도 연중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다. 서귀포시 상효동의 돈내코계곡이 바로 그곳. 멧돼지가 많이 출몰한 지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난대 상록수가 숲을 메우고, 시원한 물은 골짜기와 폭포를 메운다. 돈내코계곡의 백미는 5m의 원앙폭포. 해마다 음력 7월 15일 백중에 제주 여인들이 물맞이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을 맞으면 통증이 낫는다는 민간요법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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