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불가사의의 세계 -
에셔
에셔의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세계의 견자(見者)로 하여금 논리적으로는
따질 수는 없으나
낯선 세계에 대한 묘한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을 불쾌감이라 해야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은 아마도 그의 그림이
매우 세밀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공간과 매우 근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실제할 수 없는
공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는 짐승들이나 혹은 거울이란 것을 처음
마주하는 아이들,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마술의 집'에서 거울의 방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그런 기분과 흡사한 것이다.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께 할 수 없는 공간을 에셔는 만들어내고 그 긴장의 간극을
최대한 이용하여 우리들 마음 속의 세계에 침투한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그럴
듯할수록
우리는 더욱 불안해지는 것이다.
에셔의 이러한 침투 주제는 초기에는 거울, 구형의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수면에 미치는
자연의 세계 속을 보여주는 반사로 표현하고 있으며 차츰 실체와 실체와의 관계를
공간속에서 상호 매입을 보여주는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표현하였다.
에셔의 많은 판화에서 보여주는 매력은 그것들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존재할 수
조차 없는 것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기존 전통의 예술관 안에서도 많은 화가들이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작업들을 해왔다.
이미 위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살바도르 달리도 눈의 착시에 입각한 작품들을
우리에게 선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에셔의 작품 세계가 그들과 다른 가장 큰 이유는 일련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이 초현실 즉 일상의 세계와 다른 것이라는 사실(비이
성적 현실이라는 것)을 확연히 간파할 수 있게 하는 데 반해 에셔의 작품들은 아주
이성적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그리고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감성에 기대어 그들의
작품을 창조한다면 에셔의 모든 환상적인 작품들은 이성적인 구조의 결과라는 것이다.
평면위의 모든 공간적인 그림은 환상에 기초하고 그 그림에 사용되는 표면은 평평하고
이차원인데 그것은 다시 공간적이 되고,
삼차원으로 다층적으로 묘사된다.
그의 이러한 작품을 디자이너인 알베르트 프로콘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평하고 있다.
에셔의 작품은 약간의 수동적인 느낌을 수반하면서 그 안에 담겨진 구조를 발견하는
스릴을 안겨준다. 이것은 일상
생활의 체험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오히려 일상 체험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해주기까지 한다.
좌우상하 원근이라는 기본적인
개념마저도 상대적인 것이며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좌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점과 선 면 그리고
광간의 사이에 떠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있는 아주 새로운 관계를 보게
해주며, 이러한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공간구조가 한편으로는 미묘하게
보이면서도 또한
아주 실재적인 세계처럼 느껴지게도 하는 것이다.
에셔는 강의에서나 그의 글에서나 평면의 규칙적인 분할이 그의 작품에서 다루는
어떤 주제보다 더 그의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1936년 -알함브라 궁전을 두번째 방문하였을 때 - 이후로 에셔는 그 자신의 체계를
발전시켜 이 분야에서의 모든 가능성을 구체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