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세상을 달려온 용소굴 동굴수가 눈부신 초록세상을 벗한다. 하늘을 가린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도 초록빛이고 계곡에 널브러진 고사목도 초록옷을 입었다. 투명한 실타래와 비단천을 펼쳐놓은 듯 무건리 이끼계곡을 흐르던 물줄기가 기어코 초록색으로 물든다.
해발 1244m 육백산 줄기가 독수리 발톱처럼 웅크린 심산유곡. 1960년대까지 호랑이가 출몰하던 첩첩산중.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에 석회동굴이 뻥뻥 뚫린 협곡지대. 강원도 삼척 도계읍 무건리의 이끼계곡은 원시림 속에서 싱그러운 초록세상을 꿈꾸고 있다. 무건리 이끼계곡은 가는 길부터 특별하다. 갱도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오는 석회암 광산을 지나 가파른 시멘트 길을 몇 구비 돌면 차량 통행 차단기가 설치된 무건리 이장집이 나온다. 이곳에서 핏대봉 허리를 에두르는 임도는 칡꽃 향기 그윽한 숲길. 깔딱 고개인 국시재를 넘으면 아늑한 비포장 숲길이 이끼계곡 입구인 큰말까지 이어진다.
금강송으로 산수화를 그린 임도의 오른쪽 계곡은 성황골. 수백m 아래 성황골은 바라만 보아도 오금이 저린다. 육백산과 핏대봉 줄기가 맞닿은 성황골의 길이는 6∼7㎞. 용소에서 흘러내린 청류가 땅속으로 스며든 후 다시 솟아나기를 반복하는 건천으로 하고사리에서 오십천을 만나 동해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삼척 내륙은 강원도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로 통한다. 옛날에 난생 처음 바다를 구경한 촌로가 이웃에게 동해가 무척 넓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이웃은 '동해가 아무리 넓어도 우리 집 콩밭만큼 넓겠느냐'고 반문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온다. 호환이 두려워 담을 지붕에 맞닿게 쌓을 만큼 삼척 내륙은 깊고 깊은 오지였다.
한때 300여 명이 살던 무건리도 그런 마을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자 8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무건분교도 개교 28년째인 94년 문을 닫았다. 이끼계곡 입구에 위치한 학교 터는 어느 해 큰물에 폐허로 변한 채 잡초와 방초에 묻혀있다. 몇 채 남은 허름한 가옥도 농사철에만 거주해 빈집이나 마찬가지.
삼척에는 오지를 상징하는 유배지가 없다. 한양에서 가까운 영월과 정선에도 부지기수인 유배지가 삼척에는 왜 없을까.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이자 목조의 아버지인 고려 이양무 장군의 묘소인 준경묘가 삼척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까지 지어 해동육룡을 찬양한 조선 왕조가 성스런 삼척 땅에 죄인을 유배할 리는 만무할 터.
무건리 이끼계곡은 임도가 끝나는 큰말 약수터에서 300m 아래 계곡에 위치한다. 가래나무 고목 한 그루가 우뚝 솟은 오솔길에는 곤드레나물로 불리는 고려엉겅퀴를 비롯해 개망초 마타리 도라지 등 형형색색의 여름꽃이 수수한 자태로 나그네를 맞는다.
오솔길은 가파른 내리막인데다 계곡의 습기를 머금어 무척 미끄럽다. 가느다란 로프와 나뭇가지에 의지해 물소리를 찾아 헤맨 지 15분. 마침내 하늘이 열리면서 푸른빛이 감도는 소(沼)와 함께 첫번째 이끼폭포가 녹음 속에서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형상의 이끼폭포는 7∼8m 높이. 서너 갈래의 하얀 물줄기가 부채꼴 모양으로 쏟아져 내리며 굉음을 토한다. 석회석이 녹아내려 희뿌옇게 보이는 푸른 소와 폭포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어우러져 신비감을 더한다. 바로 옆 산비탈엔 10m 높이의 또 다른 이끼폭포가 선경을 자랑한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연초록 이끼바위를 흐르다 산산이 부서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그러나 감탄사를 연발하기는 아직 이르다. 왼쪽 이끼폭포 바위에 걸린 7∼8m 높이의 줄사다리와 로프를 타고 올라가면 짙푸른 용소와 두번째 이끼폭포가 협곡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풍경화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무척 험하다. 곡예사처럼 줄사다리를 타고 이끼폭포에 오르자 다시 비탈에 걸린 밧줄이 기다린다. 협곡 사이로 흐르는 물을 건너고 미끄러운 바위자락을 통과하면 무건리 계곡 최고의 비경인 용소와 이끼폭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폭포수와 매미 소리에 귀가 멀고 용소와 이끼폭포의 비경에 눈이 먼 순간. 어디선가 더운 기운이 확 밀려오더니 이어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동굴처럼 움푹 들어간 검은 절벽의 중간쯤에서 물줄기를 쏟아내는 물구멍에서 나온 열기와 냉기다. 15m 높이의 절벽은 원래 폭포였다. 40여 년 전 폭포 위쪽의 납닥소가 함몰되면서 땅속 석회동굴을 통해 절벽 중간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동굴을 닮은 검은 절벽이 남성적이라면 오른쪽 이끼폭포는 여성적이다. 계단 모양의 이끼바위를 흐르는 물줄기는 한 가닥 두 가닥 이어져 비단처럼 매끄러운 폭포수로 변한다. 하늘의 직녀가 짰다는 천의무봉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일까. 무건리 이끼계곡은 팔월의 녹음 속에서 가느다란 물줄기로 초록색 베를 짜는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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